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겐페이 합전 (문단 편집) === [[헤이지의 난]] === 1159년 12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는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쿠마노로 참배를 떠난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 상황과 천황을 궁궐에 유폐시켰다. 신제이는 급히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결국 참수되고 말았고, 여행길에서 급보를 전해들은 키요모리는 급히 교토로 돌아와 군대를 소집했다. 이윽고 타이라씨 일족의 군대가 속속 집결하게 되자 키요모리의 사기는 충천하게 되었고, 이 소문을 들은 무사들이 키요모리 쪽에 몰려오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요시토모의 군세는 상황에게도 패퇴하여 점점 사기가 떨어지게 되었다. 12월 26일 아침, 궁궐의 뜰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키요모리의 장남 [[타이라노 시게모리|시게모리]]는 궁궐을 가득히 메운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라임 쩌는--고시를 내렸는데, >年号は平治なり、花洛は平安城なり、我らは平氏なれば、三事相応せり。 >연호는 평치(平治, 헤이지), 서울[* 화락(花洛)은 꽃다운 서울이라는 뜻이다. 洛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 [[낙양]](洛陽)에 빗댄 것이다.]은 [[교토|평안성]](平安城, 헤이안죠), 우리는 평씨(平氏, 헤이시), 삼사(三事) 상응(相應)이라! >敵を平らげん事、何の疑ひかあるべき。 >적을 평정(平定)함에, 무슨 의심 있으랴![* 이는 군기 [[모노가타리]] <<헤이지모노가타리>>의 여러 판본 중 하나의 대목으로 실제 역사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이 말이 떨어지자 3,000명의 군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요시토모-노부요리의 군사가 지키고 있는 대현문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한편 요시토모의 장남 요시히라는 아직 19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자신전 앞의 벚나무와 귤나무 사이를 치달리면서 시게모리와 용맹히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토모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 요시토모는 미나모토씨의 근거지인 토우고쿠로 도망치던 도중 [[오와리]]에서 피살되었고, 노부요리도 참수당했다. 당시 13세였던 요시토모의 아들 요리토모도 체포되었으나 키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이즈로 유배되었다. 겨우 2살이었던 우시와카(후에 요시츠네)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린 형 이마와카, 오토와카와 함께 눈속을 헤매다가 키요모리에게 발각되어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요시츠네의 두 형은 겐페이 전쟁 때 겐지의 편에 가담해 헤이케와 맞서 싸운다.] 이렇게 해서 미나모토씨는 호겐의 난에서 희생을 당한 이래 또 헤이지의 난에서 대장을 비롯한 많은 무사들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호겐-헤이지의 난을 거친 키요모리는 종1위 태정대신이 되어 지금까지 후지와라씨가 독점해 오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타이라 일족에서 공경이 16명, 전상인 30여 명, 국사와 관료 60여 명이 배출되어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키요모리는 교토 고조와 가모 강 동쪽 로쿠하라에 저택을 짓고 정치를 하였다. 그의 저택은 170호에 달하였으며 다시 그의 일족과 부하를 수용하는 저택이 그 북쪽에 늘어서 있어서 그의 세력은 천황과 상황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황실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키요모리는 둘째 딸 도쿠코를 다카쿠라 천황의 중궁으로 삼았다. 이때 낳은 황자가 후에 안토쿠 천황이 되어 키요모리는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 키요모리는 중국과의 무역에도 관심을 기울여 [[규슈]] 하카타에 항구를 만들어 [[송나라]]와의 무역거점으로 삼았다.(대표적으로 [[히로시마현]] 미야 섬에 있는 붉은 색의 도리이를 장식한 이쓰쿠시마 신사는 키요모리가 무역과 안정 항해를 기원하며 세운 것이다) 효고의 항구를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출입에 편리를 제공하고, 후쿠하라에 별장을 세워 이익을 독점하였다. 수입된 송나라의 동전도 일본 국내에서 통용하게 함으로써 상품의 거래가 활발해졌다. 키요모리는 무사로서의 최고의 지위에 올랐고 귀족의 대열에도 서게 됨으로써 귀족들은 그에게 적대감을 가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